대만의 역사

대만 사람들은 섬의 역사를 형성해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대만인들의 생각과 태도는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현지 경험의 영향 또한 많이 받았습니다.

약 400년 전, 타이난(台南) 지역에 처음으로 상륙한 중국 본토의 외성인들은 원주민들이 살던 대만 섬을 인구 밀도가 높은 중국 사회로 바꾸었습니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1949년 국공내전의 종결이었습니다. 1949년을 기점으로 많은 외성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해왔습니다. 현재 대만의 높은 인구 밀도는 대만 사회를 경쟁적이고 기업가적이면서 도시 중심적이고 외향적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대만 : ~ 1683년

대만은 약 3만년 동안 계속해서 사람이 살았지만, 16세기까지는 미지의 영역(terra incognita)이었습니다. 섬의 원주민들은 때때로 외부인과 교류하기도 했지만 중국조차도 중국 남동부 해안에서 불과 180km 떨어진 이 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1544년에 인근 해역을 지나던 포르투갈 선원들은 대만을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써 “대만 일라 포모사(Taiwan Ihla Formosa)”라 불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서양인들은 대만을 포모사로 부르곤 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24년 대만 남서부 해안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는데 이는 지금의 타이난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인은 이곳을 타이조완(Taijowan)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대만 전체 섬을 만다린어로 발전시킨 지명입니다. 몇 년 후, 그들은 대만 북쪽 단수이(淡水) 지역에 또 다른 기지를 세워 설탕, 쌀, 후추, 실크와 새틴, 도자기, 후추, 육두구, 계피 등을 거래했습니다. 그들은 대만에서의 사업이 매우 높은 수익성을 띈다는 것을 알았으나, 네덜란드로부터 대만을 탈환한 정청공(鄭成功) 장군으로 인해 대만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1644년, 만주족의 명나라 침입으로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지자 정성공을 비롯한 명나라인들이 대만으로 이주하였고, 1661년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대만에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여 이듬해 네널란드로부터 대만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정성공은 성공의 기쁨을 오래 만끽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타이조완”이라고 불리던 대만의 명칭을 안핑(Anping)으로 바꾼지 얼마 되지 않아 말라리아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대만에 세운 동녕국(東寧王國)은 21년간 지속되었고, 1683년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은 뒤 투항하여 대만 섬은 결국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중국 제국의 일부가 된 대만 : 1683년 ~ 1895년

청나라는 대만을 차지했지만, 더이상 명나라의 위협을 받지도 않았기에 일부는 대만을 가치없는 영토로 여겼습니다. 당시 중국 본토에서 섬으로의 이주가 금지되었으나, 극심한 빈곤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인근 푸젠성(福建省)의 수천 명의 농민들이 이를 무시하고 대만으로 이동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18세기에는 자이(嘉義), 신주(新竹), 타이베이(台北)와 같은 큰 규모의 도시가 출현했으며, 대만에서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와 사법 제도가 부패했기 때문에 섬은 종종 무법 상태였습니다. 도적질이 끊이지 않았으며, 푸젠성의 다른 지역에서 건너 온 외성인들은 토지와 수리권(水利權)을 놓고 원주민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1811년, 대만 인구가 2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당시 푸젠성 외성인 및 객가인 남성과 원주민 여성 사이의 결혼은 매우 흔한 일이었고, 이는 저지대의 원주민이 빠르게 동화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대만인의 DNA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대만인에게는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대만은 경제적, 전략적 이유로 서구와 일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 시대 이후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가 1859년 대만을 방문했고, 1871년 후반에 현재 컨딩(墾丁) 국립공원 근처에서 발생한 난파가 일본의 짧은 침공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타이베이 부근의 지룽(基隆)과 단수이(淡水), 타이난(台南)의 안핑(安平), 가오슝(高雄)은 대영제국, 러시아, 일본 등 일부 국가의 시민들이 불체포 특권과 같은 특혜를 누릴 수 있는 ‘조약항(treaty ports’)’이 되었습니다.

 

1884-1885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두고 중국과 청불전쟁을 치룰 당시, 프랑스군은 지룽과 펑후(澎湖) 섬을 점령했습니다. 이러한 침략으로 인해 베이징의 황실은 요새(要塞)와 철도를 위임하여 대만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여야했습니다. 또한 1885년 이전까지 푸젠성의 일부로만 취급되었던 대만은 마침내 성(省)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 : 1895년 ~ 1945년

1894년 여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은 대만과 무관해 보였지만, 청나라의 패배로 그들은 대만과 펑후 섬을 일본에 할양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대만인은 저항했고, 당시 6개월간 파견된 일본인 중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현지 게릴라 부대를 진압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사망의 대부분은 총상이 아닌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만 점령을 위해서는 말라리아와 콜레라 퇴치가 최우선 과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덕분에 일제 강점 첫 20년 동안 대만의 공중 보건이 크게 개선되었고, 아편 중독도 억제되었습니다. 한편 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철도 네트워크가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석탄과 삼림과 같은 천연 자원에 대한 일본의 통제는 분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원주민들은 또다른 불만 사항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그들의 총포와 땅을 빼앗고 원주민에게 정부 사업에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930년 가을, 대만 항일 영웅이라고 불리는 원주민 모나 루데오(Mona Rudao)는 반란을 주도했으며, 2011년에는 그의 투쟁이 묘사된 대만 장편 서사 영화 ‘Warriors of the Rainbow: Seediq Bale’가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사들은 학교에서 일본 시민을 공격하고 일본군 부대와 친일 원주민에 대한 공격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패배가 불가피해졌을 때, 모나 루데오의 부하 대부분은 항복보다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은 대만을 동남아시아 정복을 위한 기지로 사용했습니다. 수천 명의 연합군 포로가 대만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수백 명이 영양실조와 과로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약 20만명 이상의 대만인이 일본군에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자 일본은 식민지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약 70년이 지난 지금도 대만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여전히 ​​가시적입니다. 일제 시대의 공공건물은 타이베이 및 다른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으며 일본 요리, 문화 및 패션에 대한 애착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대만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고 미국의 공습으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무렵, 많은 대만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조심스럽게 낙관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대만 : 1945년 ~ 1975년

일본이 철수한 후 대만은 중국으로 반환되었습니다. 1947년까지 많은 대만인들은 새 정권에 분노했고, 쌓여가던 분노는 결국 2월 27일 한 사건으로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1947년 2월 27일, 전매국 단속원들이 밀수 담배를 팔던 여성을 과잉단속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군중들이 다가오자 단속원들이 그들의 향해 발포하였으며 이로 인해 시민 한 명이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2월 28일, 군중은 전매총국을 점거한 후 불을 질렀으며, 헌병대는 군중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고, 이는 결국 대만 전역의 파업 및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마오쩌둥의 공산주의로부터 지지를 잃고 있었습니다. 이후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중국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은 그해 12월 거점을 대만으로 옮겨 초대 총통을 지냈습니다. 150만 명이 넘는 외성인이 장개석을 따랐고, 중화민국 정권이 타이베이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개석의 대만 통치로 대만 국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부패는 날로 심해졌습니다. 그에게 반하는 행동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1970년대까지 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이 감금되거나 처형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중국의 빈곤한 농촌 인구의 처지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국민당이 중국을 잃은 이유임을 자각한 새 정권은 농지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농부들은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이후 많은 지주들은 농지 개혁을 통해 받은 보상을 공장을 세우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자 1920년대와 1950년대 사이 수출 1위였던 설탕은 곧 제조업에 추월당하게 되었습니다.

 

섬이 번영하여 형편이 나아진 대만인들은 전기밥솥과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0년 대만의 인구는 1950년의 약 두 배인 1,460만 명까지 늘어났습니다. 거리에서는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자전거와 달구지를 대체했습니다.

1975년 이후의 대만

1975년 장개석이 사망했고, 1978년 말 장개석의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이 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은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대만과 단교했습니다. 그리고 장징궈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987년 7월, 계엄령이 해제되고 새로운 정당이 들어섰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인정되기 시작했고, 해외 여행 제한이 해제되면서 중국을 포함한 해외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장징궈 사망 후, 1923년에 태어나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농업 경제학자 리덩후이(李登輝)가 대만 최초 본성인 총통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만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8년에 선출되어 당시까지 의원직을 지내던 연로한 의원들을 퇴임시켰고, 국회와 신문은 여론을 반영하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여세를 몰아 리덩후이는 대만 최초의 직선제 총통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4년 후인 2000년에는 민진당에 패배했습니다. 2008년에 또 다시 국민당으로 정권이 옮겨갔고, 2016년에는 민진당이 다시 승리하며 지금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취임했습니다.

대만은 1980년대부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까지 컴퓨터 주변 장치와 같은 첨단 제품에 힘입어 경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 이후로 성장은 더뎌졌지만 대만은 장애인, 노인, 원주민들을 위한 국민 건강 보험 제도 및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다른 분야에서 진전을 이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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